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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언어들
- 인간의 언어는 파동이 아닌 글자로 존재하기에, 같은 말을 하더라도 다른 감정이 전달되기도 하고 곡해되기도 한다. 이는 타인만이 아닌 스스로에게도 적용된다. 내가 어떤 말을 습관적으로 하는지, 어떤 표현을 어떤 상황에 반복적으로 사용하는지는 내 삶의 질과 삶을 대하는 태도에 큰 영향을 끼친다. 감정이 언어라는 액자 안에서만 보관되고 전달된다면, 나는 이 액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어떤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액자를 공유하는 것이 진짜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기에.
- 사랑하는 마음은 나를 붕 뜨게 하기도, 한없이 추락하게 하기도 하는 역동성을 띤 반면 좋아하는 마음은 온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리게 해주는 안정성이 있다. 사랑하는 마음과 좋아하는 마음에 부등호를 붙일 생각은 없다. 이 둘은 맞닿아 있는 듯 완벽하게 다른 세계를 빚어내는 감정이며 그저 ‘좋아한다’는 마음이 얼마나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지 잊지 않길 바랄 뿐이다.
- 실망이라 함은 ‘바라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상한 마음’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상한 마음’이 아니라 ‘바라던 일’이다. 실망은 결국 상대로 인해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다. 무언가를 바란, 기대를 한, 또는 속단하고 추측한 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다. 그리고 두 사람의 연애는, 두 우주가 만나서 새롭게 만들어 내는 또 다른 우주다. 당연히 완전히 다른 생태계의 법칙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덜 상처받고 더 사랑받기 위해 죽어버린 지난 우주의 검색창을 뒤적인다. 검색의 행위가 지나치다 싶을 때, 연애는 어김없이 삐걱거린다.
- 때로는 관용적으로 쓰는 말들은 잘못 쓰인 채로 굳어진 근육 같다. 익숙해져서 더이상 통증이 느껴지지 않지만, 점점 더 악화되어가는 상태…. 습관적으로 툭툭 내뱉는 표현을 의심해보면 조금이라도 빨리 바로잡는 게 좋은 그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주는 자가 받는 이를 오랫동안 세심히 지켜봐온 시간이 선물 받는 이의 만족도를 좌지우지하듯, 조언도 그렇다. 듣는 이의 성향과 아픈 곳을 헤아려 가장 고운 말이 되어 나올 때야 ‘조언’이지, 뱉어야 시원한 말은 조언이 아니다. 하물며 몸에 좋다는 쓴 약도 캡슐에 담아 삼키는 마당에, 말에도 그만한 정성은 들여야 할 것이다. 세상이 물건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가장 무용할, 그러나 사람들로도 이루어져 있기에 제일 필요한 것. 그게 ‘포장’이 가진 철학이 아닐까.
- 외롭다
외동딸, 외동아들에 붙는 ‘외’자가 앞에 붙는 말이다. 즉 ‘혼자’, ‘하나 됨’을 표현한다. 그러나 인간은 사실, 당연히 외롭다. 외로움이라는 말이 가진 서러운 감정을 차치하고서 말이다. 인간은 어찌 되었든 혼자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 속에 살고 있기에, 가끔 착각을 한다. 각자 혼자인 채로 무리지어 살아갈 뿐인데, 마치 둘 또는 무리인 채로가 기본값이라고. 그러다 나를 너무 모르는 측근을, 또는 나만 동떨어진 무리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문득, 외롭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결코 숫자에 ‘불과’한 게 아닌 부분은 전적으로 중력에 있다. 지구가 해를 도는 횟수 기준을 시간으로 쳤을 때 우리는 모두 같은 시간을 산다. 오랜 시간에 걸쳐 중력은 우리를 끌어당기고, 피부는 늘어지고, 뼈는 내려앉으며 근육도 힘을 잃는다. 나는 이런 신체의 노화가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믿는다. 돌아가신 나의 외할아버지는 70세 이후로 청력이 많이 약해지셨다. 나중에는 크게 소리치지 않으면 어지간한 대화가 어려울 정도였다. 가족들이 보청기를 권하자 할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이가 들면서 귀가 잘 안들리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다. 나는 잘 들리지않아서 평화롭기도 하다.”
처음 들었을 떈 그런 말이 더이 있냐고, 아픈 마음을 숨기고 화를 냈지만 이 말은 내게 아직도 각인 돼 있다. 어쩌면 그때까지도 나이 듦에 대한 나의 주 감정은 혐오나 공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뒤로, 나이가 든다는 것은 파도를 타듯 자연스러울 때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 육체가 약해지는 데에는 분명, 조금 더 신중해지고 조금 더 내려놓으라는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때부터였다. 또 매사에 속도가 조금 늦어지고 일분, 일초를 읽는 감각이 둔해짐으로써 세상을 좀 더 큰 그림으로 읽을 줄 아는 어른이 되는 것도, 어쩌면 신체의 노화 덕일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중력이 내게 해주고픈 말을 받아들이면서 다만 너무 아프지 않게 나이 드는 것, 그러나 숫자로 모든 걸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 육체의 유한함 앞에 겸허해지는 것, 이것이 앞으로의 내 나이에 관한 바람이다. - 참 아이러니하다. 오직 현재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우리인데 정작 생각은 주로 미래나 과거에 갇혀 있으니 말이다. 겪어온 것들(과거)로 인해 생긴 두려움으로 피어오르는 다갈올 일(미래)에 대한 걱정.
- 겁이 많다는 건 단순히 벌레나 귀신을 그런 것만의 이갸기가 아니다. 겁이 많은 자들은 지켜야 하는 것들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다. 또 자신과 얽힌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 일에 대한 신중함이 있는 자들이다. 수비에 초엵을 다하는 축구팀의 경기가 지루할지언정, 그들은 결국 강하다. 삶에 있어 충동보다는 지구력으로 대처하는 이들, 그중에서도 ‘나는 겁이 많은 편이야’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은 더욱 호감이다. ‘겁이 없음’을 매력적인 무기로 휘두르지 않는 그들은, 결과적으로 늘 강했다.
- 성장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서 비로소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더라고요. ‘내가 뭐든 될 것 같고, 만사가 뭐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는 거겠지’라고 생각하며 자기 능력치의 벽을 부딪혀보기 전까지는, 미래를 그릴 수가 없어요.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고, 내가 어떤 모양새이며 내가 어디가 부족하고 어디가 잘났는지를 볼 수 있는 기능이 작동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한번, ‘아, 나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고 나서는 그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좀 반복되어도 건강한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그랬다가 다시 무엇이든 되었다가 다시 또 떄로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가. 이 반복이 저는 인간이 겪어야 되는 아름다운 순리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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